지난 1월 30일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님, 이재용님과 함께하는 38차 고함예배를 드렸습니다.
2020년 새해에도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님과 이재용님은 24m 철탑 위에서 묵은 희망을 붙들고 외칩니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벽이 더이상 생명을 짓밟지 못하도록,
김용희님이 땅으로 내려오실 수 있도록,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질 수 있도록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았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삼성 해고노동자 투쟁 승리를 위해 끝까지 연대하겠습니다!
(사진 아래에 설교문을 첨부하였습니다.)
< 거기 계시는 주님 >
2020년 1월 30일 고함예배 설교문
최규희 목사(ncck 연구원)
늘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목사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섰습니다. 어떤 기자가 첨탑 위 김용희 님을 욕망의 바다인 강남 한 복판에 솟아있는 등대(24m)로 묘사한 것을 읽었습니다. 어느 새 올라가신지 235일이 되었고, 계절이 바뀌었고, 해도 넘겼는데 여전히 저 위에 계신 현실이 참 서글픕니다.
독일 튀빙엔 대학 본관 1층에 가면 오른쪽 벽면에.. 튀빙엔 대학 동문 중 나치에 저항하다 죽은 이들의 이름과 그 중 한 분인 본 회퍼 목사님의 글이 있습니다. 반대편 왼쪽 벽면에는 시편 말씀과 맨 아래 연도가 세 개 있는데, 1933년, 1945년, 1985년입니다. 그 세 개 연도는 1933년 히틀러가 수상으로 지명되어 나치당의 독재가 시작된 해,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나치 시대가 종식된 해, 그리고 1985년은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및 기념 작업이 진행된 해라고 합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인지.. 그 세월의 무게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 세월 속에는 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40년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기억하려 했던 사람들, 역사를 반성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려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면에서는 방향을 잘 잡고 있지만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즉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세워져 마침내 그 열매로 화해와 용서, 평화가 임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관심을 덜 가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과정이 험난하고 지난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너무 쉽게 용서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 것처럼, 우릴 '대신해서'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고난 받는 이들이 있으니 너무 쉽게 값싼 용서, 값싼 화해, 값싼 평화를 남 이야기하듯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우리는 지금 결코 값싸지 않은 이 처절한 고난의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늘을 향해 고하고 있습니다. 25년 이상을 진실을 밝히고 명예를 되찾기 위해 투쟁해오신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님과 이재용 님, 또 그 고난을 함께 기억하고 응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분들께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향한 기도와 탄식을 여과 없이 담아낸 시편의 여러 탄식시들이 생각났습니다.
에리히 쨍어의 <원수시편이해, 복수의 하나님?>이라는 연구서에 따르면 원수를 향한 노골적인 분노, 복수, 저주의 언어가 고스란히 기록된 탄식시들은 기독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이 시들을 유대교에서 발생된 본문으로 파악하고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단절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실제로 삭제, 훼손하는 신학적 오류, 오용을 범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칫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할 위험 속에서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부분부분 살아남았다는 것이지요. 에리히 쨍어는 "복수시편에 나타나는 원수들을 증오하는 시인의 표현을 시인의 상황과 관련하여 시인의 언어로 읽어야 할 것"을 지적합니다.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원수들의 비방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인간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모독하는 원수의 폭력을 하나님 앞에서 거침없이 고발"하는 것, 즉 "폭력의 행위자를 폭로하는 기도"가 바로 원수시편, 복수시편이라 불리는 탄식시라는 것입니다.
같은 책에서 여러 탄식시 가운데 "구조적 폭력에 대한 열정적 투쟁"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어 살펴봤더니 평소 참 좋아하던 시편 139편 말씀이었습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하나님, 내가 어디에 거하더라도 거기 계시는 하나님..' 주로 개인적인 관점에서 읽고 묵상하던 시편인데 탄식시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다시 잘 읽어보니 1~18절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있고, 탄식에 해당하는 부분은 19-22절까지였습니다. (분명 그 내용은 항상 거기 있었지만 제가 읽을 때는 저도 모르게 건너뛰거나 그 앞에서 이미 받을 은혜 다 받고 거기까지 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웃음)
그런데 이 시편 139편을 탄식시로서 다시 읽으니 달리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1절-18절까지의 아름다운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흔히 묵상하듯 평안한 일상 속에서 고백되어진 것이 아니라.. 실은 원수의 폭력과 협박으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 절망과 무력감 속에서 몸부림치며 내뱉어진 절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거룩한 말씀을 특별히 지금 이 곳, 이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 읽어보길 원합니다. 저 철탑 위, 인간새로 불리는 김용희님은 반평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다리도 뻗기 어려워 항상 옆으로 누워 잠을 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앉고 누울 때 뒤척이지도 못해 괴로움에 잠 못 드실 때, 그 모든 순간의 김용희 님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심을 믿습니다. 매서운 바람과 강추위에 입이 얼어붙고,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삼성의 완고함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리실 때,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를 할지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24m 철탑이 아니라 하늘 끝에 올라가시더라도 주님은 거기에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새벽 날개 붙잡고 저 동쪽 끝에 가더라도 주님은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바다 끝 서쪽으로 가더라도 음부라 불리는 저 지하 끝에 가더라도 주님은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 그 한계가 어디이든지, 그 한계의 순간에.. 주님은 거기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신을 가까이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그 한계의 순간, 고통의 순간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고,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시던 하나님과도 단절되는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실 때, 그 한계의 순간에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바로 거기 계셨습니다. 우리의 한계의 순간에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김용희 님과 이재용 님, 이 땅의 곳곳에서 불의에 저항하며 고통의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11절에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에서 '덮다'라는 단어는 '입을 크게 벌리다', '물어뜯다', '압도하다', '상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어둠이 삼킬 듯이 우리 존재를 흔들며 위협할 때.. 내가 빛이라 여겼던 그것이 밤이었구나 하며 절망이 몰려올 때 우리는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흑암도 우릴 숨기지 못 하고, 빛과 어둠이라는 우리의 구별조차 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어야 하겠습니다. 우릴 오묘하게 지으신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지난 나날들, 그 모든 하루하루를 다 기록하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시므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으므로(17절) 우리의 존재는 모두 존귀합니다. 우리의 노동은 신성합니다. 이 귀한 진리를 그 어떠한 진흙탕 같은 투쟁의 현장에서도 우리가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존귀함을 기억해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고, 서로 보듬어 안아가며 이 길을 함께 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9-22절입니다. "하나님, 오, 주님께서 악인을 죽여만 주신다면...! 피흘리게 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거라" 그들은 주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며, 주님의 이름을 거슬러 악한 말을 합니다. 주님,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으며, 주님께 대항하면서 일어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너무나도 미워합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사람들과 부딪히며 분노를 계속 품고 있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는 것 만큼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인처럼 하나님께서 빨리 그 대상을 거둬가 주시길 바랄 때도 있습니다. 내 안에 가득 찬 미움과 분노가 괴로워서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훅 그 다음으로 얼른 넘어가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결론내고, 빨리 마무리 짓고,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올라오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시편의 마지막이... 결국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청원으로 끝나는 것을 주목해보아야겠습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살펴봐주시라고, 나를 철저히 시험해 봐달라고, 내가 나쁜 길을 가지 않는지 살펴봐 주시라고 간구하면서 자신의 동기와 자신의 생각, 계획, 걱정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 돌아봅니다. 결국 주님의 인도하심을 청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과 복잡한 마음 그대로 주님 앞에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구합시다. 결국 주님의 정의가 펼쳐지고 진정한 평화가 아름답게 꽃 피울 때까지.. 우리가 우리의 자리에서 버틸 수 있도록, 우리의 역할을 잘 감당해낼 수 있도록, 우리와 늘 함께 거기 계시는 주님께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른스트 케제만 교수와 그 딸 엘리자베스 케제만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신약학자 에른스트 케제만 교수님의 딸 중에 엘리자베스 케제만이 있는데 아르헨티나 유학 중 독재자에게 저항하다가 1976년 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독일 정부가 아르헨티나와의 관계를 이유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1977년 당시 케제만 교수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해 '교회의 날'에 성경공부하고 있던 중, 딸이 어제 총살당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이 때, 1년 동안 딸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던 케제만 교수가 오히려 담담하게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는데 그 모습이 당시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였던 이들이 함께 뜻을 모아 진정서를 내고 서명을 하고 재단을 만들었는데, 이 재단의 목적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멈추지 않고 과연 누가 정부에서 중재하는 것을 막았는지, 아르헨티나에서 누가 엘리자베스 총살에 개입했는지 밝혀내서 정의의 법정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결국 아르헨티나에서 해당 총살 명령을 내린 사람을 찾아내 인계받아 독일 법정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광주 민주화운동/항쟁 40주년이네요. 이제 곧 진실이 남김 없이 밝혀질 것을 기대합니다. 김용희 님과 이재용 님의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우리 모두 알 수 없지만, 끝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들을 함께 해 낼 때,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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