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체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것은 맑은 공기였다. 한국에서 미세먼지에 시달리다보니 더욱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도심에서도 긴 가시거리와 답답하지 않은 공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초기에는 밖에 나설 때 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공기가 좋다는 것이 삶에 질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체감하며 ‘공기 정말 좋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물론 10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도 밖으로 나서면 한번은 말하게 된다.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되면서 한국에 돌아가면 미세먼지를 또 어떻게 버텨내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사진#1 : 멜번을 관통하는 야라강 다리에서 바라본 전경)
한국에서 내가 지내던 도봉구 쌍문동은 친구들이 오면 시골 같은 동네라며 집 앞의 시장과 마을까지 내려오는 산 공기에 놀라곤 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맑고, 시원한 공기에 ‘아~ 또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3~4년 정도 전부터 동네에서도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퇴근하면서 드는 생각도 ‘아~ 이런 공기 속 서울에서 계속 사는 게 과연 잘하는 것일까?’ 라고 바뀌었다. 공기가 안 좋은 날은 정말 하루하루를 살아간 다기 보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사진#2 : 멜번의 칼튼 공원)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호주에서도 대기 오염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 국영 미디어 SBS의 2018년 11월 기사에 따르면 호주에서는 대기 오염 문제로 매년 3천 명 정도의 조기사망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내용을 발표한 호주 보호 재단(Australian Conservation Foundation)의 보고서 <더러운 진실(The Dirty Truth)>에 따르면 호주에 있는 오염물 유발 시설의 90% 이상이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환경오염이 계층에 따라 부담 지워지는 것이 다르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내용은 새삼스럽게 내 머리를 강타했다.
‘환경정의’라는 말이 있다. 환경정의란, 환경을 이용하는 혜택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피해와 책임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 관심과 실천의 밖에서는 지켜지기가 어렵다. 사실 이러한 문장보다 환경정의가 무엇인지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1996년부터 김포시는 공장 설립에 대한 규제를 점차 완화했고, 그 결과 김포시에는 6천개 이상의 공장이 새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여 2015년 시행된 김포시 대상 집중단속 결과에 나온 주민들의 건강검진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공장 설립 이후 주민들은 전국 평균보다 높은 사망률과 전국 평균의 2배 이상의 암 발생률을 보였고, 평균 이상의 유해물질이 체내에 있었으며, 카드뮴 및 중금속이 기준치를 초과했다. 환경을 이용하는 대가로 얻은 피해는 김포시의 주민들이 입었고, 주변의 공장들은 환경을 이용하여 혜택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공장에서 만든 제품의 최종 소비자일수도, 혹은 김포시의 환경오염에서 파생된 오염의 피해자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환경정의는 특정 사건, 시간, 인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처럼 환경오염은 낮은 계층에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낮은 계층에서는 환경을 보호하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느낀 경험이 있다. 산 속에 있는 대안고등학교를 다녔던 시기, 학교에서는 친환경 샴푸와 치약을 사용하자는 규칙이 있었다. 당시 ‘지구특공대’라는 이름의 환경동아리가 단체구입 및 교내 판매를 대행하고 있어 이들 물품은 자연스럽게 학교 내에서 접근성이 낮았다. 동아리에 속해 있지는 않았던 나지만 20살이 되어 집을 나와 독립하면서 인지부조화를 겪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나에게는 가격이 싼 물건들 중에서도 할인하는 것을 구매하는 것이 장보기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의 장바구니에 친환경 제품이나 유기농 제품을 담는다는 것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경제적 상황과 타협하면서 스스로 환경오염의 가해자이자 방조자이며 피해자라는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
지구 환경 문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공유지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 환경 자체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맞닥뜨릴 결과는 인류 최악의 비극이 되리라는 것이다. 현재 세계는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틀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상에 소유권을 부여하고, 돈으로 가치를 환산하며, 수요와 공급의 거래를 통해 인류의 물질 대사를 이행하는 자본주의는 과연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환경의 희소가치가 상승하여 시장이 환경을 구제하리라는 믿음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다고 본다. 나에게는 2018년 1월 중국이 재활용쓰레기를 수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전 세계가 들썩였던 것이 그 신호라고 느껴졌다.
11월부터 멜번이 속한 빅토리아 주는 일회용 비닐봉투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음식점에서 테이크 어웨이(테이크아웃을 호주에서 이르는 말)를 하는 경우에도 종이봉투를 사용해야만 한다. 한국은 2019년 4월부터 대형마트와 일정 규모 이상의 슈퍼마켓에서 비닐봉투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순식간에 소비의 판도를 바꿔버린다. 한국에서 비닐봉투 사용 금지 정책으로 1년간 기대되는 비닐봉투 억제 량이 22억 2800만장이라고 하니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실행되기까지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에너지가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리는 일에, 조금 더 번거로움을 감수할 수 있다는 실천력을 보여주는 일에, 환경 보호와 환경오염에 관심을 가진 유권자가 있다고 알리는 일의 시작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며, 선뜻 일상의 영역에 들여놓기가 어렵다는 점은 나도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생각이 들 때 스스로 되뇌는 말이 있다. 헤리포터의 헤르미온느로 알려진 엠마 왓슨이 UN총회에서 페미니즘 캠페인에 대하여 낭독한 연설문에서 들은 이 문장은 항상 조금 더 나를 움직이게 한다. 연설문의 마지막 문장이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And to ask yourself if not me, who? If not now, when?”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라고”
------
<얼룩말 호주에 가다>는 필자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바라본 일상에서의 환경 이야기를 담습니다.
<필자 소개>
이재욱 전 생태지평연구소 연구원
생태지평연구소 전 연구원이자 전 프리랜서 기타 강사.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며 무턱대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온 33살.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