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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혁명을 굽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1부를 읽고-
발제: 이종건
-맑스주의가 ‘뜨거운 감자’인 이유
우리가 사는 시대에 더 이상 맑스는 대중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다.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평가받으며 ‘고리타분’한 고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의 외면과는 별개로 ‘맑스’는 아직도 우리에게 하나의 화두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영화사에서 위대한 획을 그은 채플린을 누구도 ‘맑스주의자’ 라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모던타임즈’가 자본의 모순을 꼬집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 ‘맑스주의자’였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의 업적과 사상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민족주의자인 ‘김구’는 ‘급진주의적 민족주의자’로 우파에게 비판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당시 김구보다도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여운형’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386세대가 사회의 한 축을 감당하며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노위 비롯 사회주의 운동 계열의 공헌에 대해서 기념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역사가 주체적으로 맑스를 배제하고 있다. 아니 사회가 맑스주의를 배제하고 있고 기득권층에게 아직도 맑스는 ‘혁명적’이며 그 자체로 ‘무기’이다. 입에 담아선 안 되는 ‘볼드모트’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밝혀도 잡혀가지 않는 시대다.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고 인증샷을 자랑스럽게 올릴 수 있는 시대다. ‘맑스’가 만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파는 혁명적으로 맑스를 배제했고 사회주의를 대중에게서 분리하는 것에 성공했다. 맑스를 금지함으로서가 아닌 배제함으로서. 이는 대중의 정상적 흐름에 따른 발전이 아닌 ‘개입’에 의한 의도적 ‘배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그만큼 ‘맑스’가 혁명적이라는 것을 되려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맑스주의는 어떻게 혁명적인가? 맑스는 어떻게 자본의 모순을 꼬집고 있나? 유효하지만 해묵은 논쟁이다. 생산수단의 소유가 곧 자본가라는 탁월한 정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진리이다. 논리적으로 이를 반박할 수 없다. 노동하는 이가 실제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고 있음은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로인해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뛰어드는 사람이 적을 뿐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에 대해 모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는 눈치다. 또한 위대한 혁명이론가 로자 룩셈부르크등이 예언했던 것처럼 자본의 비자본영역 팽창은 극에 달해 전쟁을 경험했고 그로인해 수정된 자본주의가 등장했으며 다시 신자유주의로 진화했다. 금융경제라는 모순투성이 자본주의는 끝까지 팽창하는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예상된 것이었다는 것을 근거삼아 필연적으로 무너질 것이라 우리는 이성적으로 전망할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저자인 와타나베 이타루는 그의 저작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맑스’를 말하지만 정작 ‘공산주의’를 살아내는 사람이 없다.” 라는 부분을 말이다. 저자는 맑스를 삶으로 끌어왔다. ‘빵’이라는 일상의 매개를 통해 맑스와 대중을 잇는 교두보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해묵은 것을 살아냄으로 그것이 아직도 유효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느린 방식을 통해 혁명적 일상을 이루어냈다. 전위조직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체제와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혁명을 이뤄낸 것이다. 그 일상의 혁명에는 당원이 필요하지 않다. 강령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려운 단어나 맑스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필요 없다. 다만 ‘공산당 선언’ 이 그러했던 것처럼 ‘필요’에 의해 그것에 동의하면 대중은 혁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도 쉬운 방식으로 말이다.
유럽연합을 위시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재수 없어 (속된말로) 보이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비방이 아니다. 제3세계를 전제로 하는 비자본영역의 세련된 착취를 근거 삼은 복지정책은 그 자체로 재수가 없으며 그 자체로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이냐 하면, 새누리당 의원이 “이제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말이 사회민주주의지 창출된 잉여이익을 통해 쥐꼬리보다는 조금 큰 쥐대가리를 민중에게 던져주고 그것을 물어뜯게 만드는 것이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으며 전혀 개혁적이지 않은 지속 불가능한 경제체제의 개량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사민주의를 잉태한 것도 사회주의다. 실패한 사회주의가 마련한 공간에서 발생한 체제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맑스주의에 있다.
맑스주의가 가장 ‘현실’적이고 ‘혁명’적일 때에 이러한 비판은 유효하지 않았다. 대중의 혁명열망을 읽어내고 그것을 앞서 준비하는 전위로서의 당이 아직 유효했던 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포스트 모던 시대를 거치며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운동의 조각들이 다시 뭉칠 일은 없다. 세월호이전과 이후로 대한민국 사회가 나뉜다는 얘기가 무슨 구호처럼 나도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중간한 혁명정신과 그로인해 비롯되는 보상심리로 반자본주의 전선이 넓어지진 않는다. 전술이 바뀌어야 한다. “균”이라는 신선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부패되는 경제”라는 혁명적 언어로 맑스주의를 번역한 저자의 공헌이 이 지점에서 빛나고 있다. ‘구호’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변방의 작은 시골빵집을 시작으로 전통공예가의 삶이 바뀌며 밀 생산자의 삶이 바뀐다. 가정이 지향하는 바가 바뀌며 개인의 인생이 혁명가의 삶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속가능한’ 작은 체제로 그 공간에 자리 매김하게 된다. 문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에 있다. 백날 맑스가 대안이라고 제창해봐라. 한명이라도 따라 붙나.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 가치에 동의하더라도 헌신하는 이는 없을 테다. 이것이 유효함을 알리기 위해선 실제로 ‘유효’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시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모든 시대의 대중은 그 가능성에 자신의 인생을 투신했다.
-현실
얼마 전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나가있다가 잠시 귀국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교회 청소년부 소속의 아이였다. 중산층 부모 아래서 모자랄 것 없이 누려온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울먹이며 말하는 아이의 불만토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당과 과천사이에 위치한 이 교회는 대부분이 386세대이며 남선교회 특송으로 상록수를 부르는 교회다. 하버드생부터 시작해 대한항공 스튜어디스까지 청년부도 빵빵하게 포진되어 있다. 벤츠를 모는 집사가 세종대왕 오른 전도사를 칭찬하는 곳이다. 자본가와 중산층이 복잡 미묘하게 섞여있다. 이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취미삼은 중산층의 딸이며, 미국유학생이다. 반년 만에 귀국한 고향에서 이 아이는 가장 친한 친구를 단 세 번 만날 수 있었다. 그 점잖고 신앙적인 부모가 윽박을 지르며 공부를 강요한 탓이다. 교회의 다른 아이들은 방중에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 대학과 취직까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상고다니는 애들 만나지 말고, 공책에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공부’하라는 것이다.
자본가와 소부르주아지 사이에서도 이 경쟁과 갈등이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다. 기득권 층 조차도 자신의 자리에 안주할 수 없으며 생산수단에서 기술로 뒤처지게 되면 도태되는 구조인 것이다. 돈이 얼마가 있든 자기 자식을 안아줄 여유조차 가지게 될 수 없는 이 불합리한 구조에서의 해방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해방’이다. 결코 어느 한 계급의 승리로 끝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적을 모두 전향시켜야 한다. 적의 전략과 전술을 낙후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기득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맑스를 살고파
그런 꿈이 있다. 지향하는 바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맑스가 바래왔던 이상을 살아내는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다. 대중을 외면한 소부르주아지적 소망이 아닌 대중을 향한 열망이 기반 되어 ‘함께살자’라는 외침으로 거침없이 번질 그런 공동체 말이다. 그 자체로 매력적이고, 그 자체로 혁명적인 공동체. 구성원이 어떤 사람이던 간에 바라보는 사람이 어떤 계층에 있던 이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물론 이것은 체제를 바꾸겠다는 것만큼이나 이상적이다. 또한 체제를 바꾸는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투쟁 없이 이러한 운동을 꿈꾸는 것도 기만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혁명적 운동과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운동이 함께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또한 이상적일까? 아무튼 이 책의 1부는 질투날정도로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나도 맑스를 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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