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속 적색/ 해나디> 2번째 시간
시간: 2014년 9월 29일 오후 6시 30분
장소: 고난함께 사무실
참석: 이관택, 이종건, 이종화, 고나현, 최건희, 이중호, 이하늬, 한은비, 김중연, 박재현
후기_ 박재현
후기를 빨리 올렸어야 했는데,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오늘 책모임은 고난 사무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작은 사무실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니
더욱 풍성하였습니다. (더불어 출처없는 발smell도 함께)
최건희 총무가 추천한 <무지개속 적색>을 마무리하는
시간으로 발제와 함께 서로 나누고 토론도 하였습니다.
내용도 어렵고 낯선 개념들도 많았지만,
계속 따라가 보기 위해 열심히 쫓아갔습니다.
(결국 어려웠지만요..)
다음 모임 땐
꼭 책을 읽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다져봅니다.
다음 모임 때 읽을 책은 <영원의 철학>입니다.
후기를 작성하는 저는, 다음주엔 제주도를 가게되고
이제 집도 이사하게 되어 두근두근 모임 참석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밴드 통해 읽고 느낀점을
간단한 레포트 형태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하네요.
우산 잘 챙기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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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 디, ≪무지개 속 적색≫을 읽고서
발제자 : 최건희
시설에서 살다가 탈시설을 준비하면서 서울로 여행을 나온 이들은 부양의무제도에 따라 자신들을 부양할 가족(부모님)이 있는지, 이유는 수급자 기준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구청을 찾아갔다. 한 분의 호구조사(?)가 진행되는 중에 구청직원은 장애인 A씨에게 재차 묻는다. 아버님 성함이 ㅇㅇㅇ씨 맞으시죠? 네. 그럼 어머님 성함은 □□□씨가 맞나요? ‘예’와 ‘아니오’의 표시가 약간 불분명하지만 충분히 구분이 가능한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다시요. 아버님 성함이 ㅇㅇㅇ씨이시죠? (끄덕끄덕). 그럼 어머님 성함은 □□□씨... 아니요.. 두 번은 더 물었던 것 같다. 수십년을 시설에 살면서 가족과 단절을 겪어 왔던 통에 부모님 성함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아버지가 재혼한 것일 수도 있겠다. 뜨거웠던 밤이 지나고 10개월여 기간동안 아버지의 핏줄로, 어머니의 탯줄로 품어진 피붙이는 그러한 사실과 사건만으로 어버이라는 이들과 매우 특별하고 긴밀한 만남이다. 생명의 탄생의 기쁨과 경이로움은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길없고 아름다운데 그 중 어떤 생명들은 사회와의 만남의 순간, 정녕 사람들의 놀란 눈 속에 맺힌 그 순간, 알 수 없는 저주라도 받은 듯 다물 줄 모르는 입들을 마주케 된다. 사회에 의해 그냥 가족, 혈연일 뿐인 이들에게 부양의무자라는 도장이 찍히고 그걸 감당해낼 수 있는 부부는 그리 많지 않다.
부.양.의.무.자. 정부가 그들 부부에게 명한 숙제다. 혈연이라는 아주 독특하고도 단순한 이끌림과 끌어당김을 이용한 국가적 차원의 큰 짐을 그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만 것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그들이 말하는 가족 안에 할 수만 있으면 장애인과 성소수자도 포함시키려 한다. 할 수만 있으면. 하지만 ‘할 수만 있으면’이다. 가장 이상적인 비장애인·이성애자들로 구성된 가족엔 아주 구체적인 구성원들 간의 역할을 제시하고서는 그 롤모델을 공익광고에 장려하는 분위기로 띄운다. 가장 이상적인 그 가정은 결코 ‘잘 되는’ 가정이 아니다. 그들의 생활은 나아질 줄을 모르고, 지쳐갈 때쯤 세대가 뒤바뀌어 재충전이 되어 이어가진다. 출산 억제 정책과 장려 정책은 번갈아 가면서 작은 변동들을 조정시킨다. 그들의 삶의 애환들은 아주 감성적인 동영상 하나 정도로 위로하거나 하면 그 속에서도 생활을 포기하는 이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까지 왠만해선 줄여낼 수 있다.
총칼의 시린 쇳빛이 콱콱 박혀 있는 그 흔한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나가야 하겠지만 적어도 본질은 피가 아니고, 총칼도 아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언제 어느 순간이고 명랑함을 놓치지 않는 것. 사회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던 혁명이다.
윤태호 만화 ‘인천상륙작전’에 묘사되어 있는 한국전쟁 당시엔 국군이 한 마을을 점령했을 때에 서로 신뢰하던 이웃집 사람을, 자신에게 먹고 잘 공간을 마련해준 이들에게조차도 신뢰를 깨어버리고 ‘저 사람이 빨갱이다!’하여 팔아 넘기고, 사형에 내어주고 자기 삶을 이어가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 돈독한 이웃관계도, 그 고마운 은인조차도 국가 단위의, 세계적 단위의 폭력이 닥치고 극심한 가난의 덮침 속에 너는 너. 나는 나가 되어 심지어는 가족도 희생에 넘겨준다.
우리의 이웃 성소수자·장애인들인가? 그들의 이름이 아직도 금기시되는 교회가 있다. 그들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음이다. 어느 철학자의 존재 개념에 따르면 우리에게 존재로서 인식이 되려면 만남과 소통이 있어야 할진대 나아가 그들과 ‘나’라는 존재가 이어져 얽혀있는 존재가 될진대 과연 성소수자·장애인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그들(대상화된)’ 이상인가? 설사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우리의 근처에 가까이 있다해도 자신들의 성정체성을, 장애를 자신들의 존재로서 밝힐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을 탓할 수는 없다. 현실은 변혁시켜야 한다. 아름다운 성의 역사로서 우리 주변에 자리했었다는 LGBT. 그러나 억압과 전체주의, 자본주의의 기제 아래 희생당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어느 순간 그들은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지배체제의 기반이 흔들릴 때마다 그들에 대한 혐오 범죄가 급증하기 시작해왔다. 대처를 비롯한 우파 세력들이 세력을 다지기 위해 그들을 에이즈의 원인으로 몰아간다. 튼튼한 억압의 기반 아래 돈의 논리적 배경 아래 그들은 한 면에선 상업화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그들의 성교장면은 역겹다든지, 에이즈 환자들이라든지, 생육 번성에 있어 반생명적이라든지 하는 빈약하지만 강력한 헤게모니로 공격받는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고 성경 전체가 아닌 고작 몇 구절에, 뜻 아닌 문자 아래, 그들의 피를 외면하고 과학적인 논리를 따지고 다양성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채로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한다지만 가장 큰 지배 담론의 범접 못할 권위에 의해서 소멸되어진다는 것을 보아왔다.
무지개 속 적색은 해방운동의 역사이다.
그 중에서도 적색은 스톤월인 운동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분리정치를 파하고 모든 억압을 연대시켜 나간 사회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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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월) 두근두근 책모임 글: 두더지
무지개가 약속의 증표인 이유
해나 디, [무지개 속 적색], 이나라역, 책갈피, 2014.
□ 붉은 피 속에 가려진 무지개 빛깔의 역사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을 만나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제목’이 섹시했다는 것이다.(혹시 섹시하다는 표현에 거부감이 들었다면 그 감정의 원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성소수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해방과 억압의 근본적인 시작은 바로 그 ‘감정’에서부터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섹시하다’는 말이 불편한 2가지는 너무 ‘성적인 표현’이라는 생각 또는 너무 ‘가벼운(상업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을 포함하지 않는가.)
“무지개 속 적색”이라는 책의 제목은 맑시스트의 관점에서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풀어내려는 지은이의 의도가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난 붉은 빛에 물들어 있는 표지 사진 속사람들을 보면서, 또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성소수자의 역사가 결국 죽임과 핍박, 차별과 박해 속에서 죽거나 혹은 살아남은 이들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무지개와 같은 삶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이들이 붉은 피를 흘리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지난 시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기독인으로서 이 혹독한 세월을 형성하는데 무관하지 않은 나 자신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고, 반성하고, 다짐하며, 고민한다.
□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거부감, 그 거부감이 거부한 존재들
저자는 성소수자 해방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끊임없이 노동운동과 당시의 정치운동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레닌의 러시아 혁명 그리고 독일과 영국 등 일련의 혁명들이 가져온 성소수자 인권의 진보를 이야기 한다. 반대로 ‘성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성소수자들 고유의 투쟁은 결국 시대와 전체 운동 조류에 의해 흥망성쇠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나는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성소수자’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지난 이들과 그 정체성이 가져오는 사회적 차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자본주의’로 풀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와 해방’이라는 커다란 틀어서, 특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시대적 모순의 야만성 앞에서 더 중요한 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을 분석해 낼 수는 있지만, 그 운동의 결과와 과정을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목도하며, 평가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여전하다. 또한 ‘해방’이란 가치는 실제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가 아닌가.(해방의 기준과 해방이 발현된 모습은 일관적이지도 않으며, 꼭 집단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명 또한 정말 뜬금없을 때가 많지 않은가.)
20세기 초의 사회주의 혁명과 일상을 변혁시키며 다양한 정체성의 무지개 빛깔을 우리 삶 속에 선물해준 68혁명으로 이어지는 해방운동은 최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폭압적인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인해 무지개를 기대할 수 없는 먹구름 가득한 긴 장마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나온 운동의 역사를 분석하며 평가한다. 이 가운데 부딪히는 두 가지 운동이 혁명의 주류운동과 부문운동이라 불리는 신사회운동(라이프 정치)이며 이것은 표면적으로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으로 드러난다.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다루는 이 책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느낌은 주류운동이 갖고 있는는 (6.8혁명 이후 전면적으로 발전한) 개별적 정체성 운동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결국 이 거부감은 존재 자체로 차별받아온 이들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 결국 무지개란 하나이기에 아름답다.
저자는 결국 하나 됨과 연대를 강조한다. 개별 주체가 개별 사안에만 매몰되어서는 이 신자유주의 광풍을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각 부문의 운동이 여전히 서로를 지지하고, 시대의 상황에 맞는 해방의 어울림을 이어갈 때에만 운동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동의 발전이라는 표현은 좀 나이브하다. 운동의 발전은 생존의 다른 이름이며. 모두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지개는 수만 가지 색이 어울려 존재하는 하나의 연대체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구원의 약속을 상징한다. 서로가 어울릴 수 있는 삶의 형태는 결국 구원의 실체이며, 이는 다양성을 통한 서로 간의 얽힘과 연결됨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아직도 약속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무지개 빛깔이 우리 삶을 감싸 안고 있음에 감사한다. 인지되지 않는 비가시적 영역까지도 이 수만가지 색의 어울림은 우리 존재와 얽혀있다. 그 이미지는 마치 하나님과 내가 어떤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140929 무지개 속 적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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